답변해드립니다

    Re: 금식에 관한 질문드립니다.
    2026-08-22 16:45:46
    이상일
    조회수   14

    항상 귀한 말씀 잘 가르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마태복음 6장 16~17절에 보면 금식할때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지켜야할 마음와 자세에 관한 부분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읽던 중에 ‘금식하는 그들에게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금식하는 자들에게는 상이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할수 있는가요?

    상이 있는데 그들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로 이미 상을 받았다고 하셨다는 것은 상이 있다라고 여겨도 되는 것인가요?

    또 ‘금식하는 자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셨는데 금식하는 자들에게 갚아주신다는 것은 그들의 간절한 바램을 이뤄 주신다고 이해해도 되는가요?

    물론 응답에는 yes만 있는게 아니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갚아주신다고 표현하신 것을 인터넷에서 헬라어로 어떻게 쓰였는지 찾아보니 '아포디도미(ἀποδίδωμι)'라고 썼다고 나오더군요 그리고 이 의미는 "진 빚을 갚다", "정당한 대가(임금)를 지불하다", "물건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다"라고 되어져 있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행하실 바를 적시하셨다고 보는데 제가 이해하는 바가 맞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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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질문입니다. 말씀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원어까지 찾아보고 물으시는 게 참 귀합니다. 이런 질문 하나가 강좌 열 번보다 나을 때가 있어요.

    하나씩 짚어드릴게요. 

    첫째, 상은 있습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6장을 통으로 보시면 금방 보입니다. 예수님이 세 가지를 연달아 다루시거든요? 구제(2~4절), 기도(5~6절), 금식(16~18절).

    그런데 이 셋을 다루실 때마다 똑같은 두 문장이 반복됩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리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 반복이 뭘 말해주는 겁니까? 예수님이 지금 따지고 계신 문제는 상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는 거에요. 누구한테서 받을 거냐를 따지고 계신 겁니다. 상이 없다면 두 번째 문장이 아예 성립을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금식하는 자에게 상이 있다고 읽으신 것, 정확합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상 바라지 말라는 설교가 아니에요. 5장 12절에서도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하셨고, 6장 1절에서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하셨거든요? 상을 구하지 말라가 아니라, 너무 싼 상에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인 겁니다.

     

    둘째, “이미 받았느니라”는 영수증에 찍는 도장 같은 말입니다.

    여기 쓰인 헬라어가 ‘아페코(ἀπέχω)’인데요, 이게 당시 상거래 문서에 흔하게 쓰이던 말이었어요. 물건값을 다 받았을 때 영수증에 적어 넣던 표현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완불”, “더 받을 것 없음” 이런 거죠.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 사람들 금식이 헛수고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하던 걸 정확하게, 그것도 전액 다 받았다는 뜻이에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고, 사람이 봐줬습니다. 거래 끝났고 계산 맞았어요. 문제는 자기 값을 너무 싸게 매겼다는 겁니다. 이제 아버지께 청구할 몫이 하나도 안 남았다는 거, 이게 이 말씀의 무서운 지점이죠.

     

    셋째, ‘아포디도미’ 풀이는 정확합니다. 다만 한 가지를 더 보셔야 합니다.

    찾아보신 뜻이 맞습니다. ‘아포(되돌려)’ + ‘디도미(주다)’니까, 마땅히 치러야 할 것을 치른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꼭 보셔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이 동사에 목적어가 없어요. 본문이 “네 소원을 갚으시리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네가 구한 것을 주시리라”라고도 안 해요. 그냥 “네게 갚으시리라”입니다. 뭘 갚으실지는 말씀을 안 하신 거죠. 구제할 때도(4절), 기도할 때도(6절), 금식할 때도(18절) 세 번 다 똑같이 비워두셨습니다.

    그러면 이 단어가 못 박아준 게 뭡니까? 두 가지에요.

    하나는 갚으실 분이 누구신가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시라는 거죠.

    또 다른 하나는 반드시 갚으신다는 확실성입니다. 아무도 못 본 자리에서 한 일이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는다는 거에요. 하나님 편에서 그건 반드시 정산하실 몫으로 남습니다.

    말씀 안 하신 건 '갚으실 내용'하고 '시점'이고요. 마태복음 안에서 이 단어가 또 어디 쓰였나 보면 도움이 됩니다. 16장 27절이에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같은 동사죠? 마태가 이 말을 쓸 때는 대체로 마지막 정산을 바라보고 씁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덧붙일까요? 후대 사본 중에는 이 구절에 “드러나게”가 붙어서 “드러나게 갚으시리라”로 된 것들이 있어요. 킹제임스 성경 계열이 그렇습니다. 초기 주요 사본에는 없어요. 이게 뭘 말해주는 겁니까? 옛날 필사자들도 집사님이 지금 하신 질문하고 똑같은 궁금증을 품었다는 거에요. 눈에 보이게 갚아주신다고 못 박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본문은 끝내 못 박지 않고 열어둡니다.

     

    넷째, 그럼 하나님이 우리한테 빚을 지시는 겁니까?

    “갚는다”는 말을 쓰면 자연스럽게 이 질문이 따라옵니다. 성경은 그쪽 길을 분명하게 막아놔요. 로마서 11장 35절은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하고 되묻고, 누가복음 17장 10절은 할 일 다 한 종에게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말하게 하시잖아요?

    그러면서도 갚으신다고 하십니다. 이게 어떻게 같이 서는 겁니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걸 잘 정리해뒀어요. 하나님은 우리한테 뭘 받으셔서 빚진 자가 되신 게 아니라, 스스로 약속하심으로 빚진 자가 되셨다는 겁니다.

    이 구분이 중요해요. 갚으심의 근거가 내 금식의 무게가 아니라 그분의 약속의 무게라는 거죠.

    사실 이편이 훨씬 든든하지 않습니까? 내 금식이 초라했던 날에도 약속은 안 흔들리니까요.

     

    다섯째, 그러면 간절한 바람을 이뤄주신다고 읽어도 될까요.

    집사님께서 “응답에 yes만 있는 게 아니란 건 안다”고 미리 써주셨는데, 그 대목이 이미 답의 절반입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조심스러워요.

    금식이 하나님 앞에 내 간절함을 다 쏟아놓는 자리인 건 맞습니다. 그 간절함을 아버지께서 외면 안 하신다는 것도 맞아요. 다만 ‘금식하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등식이 서는 건 아니에요.

    다윗을 한번 보세요. 아이가 병들었을 때 밤새 땅에 엎드려 금식했는데 아이가 죽었잖아요? 그때 다윗이 한 말이 이겁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하여”(삼하 12:22). 혹시, 누가 알까. 처음부터 '금식=응답' 이라는 등식을 기대하고 금식한 게 아니었다는 거에요.

    그리고 아이가 죽고 나서 다윗이 뭘 했습니까?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했어요(삼하 12:20).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죠? 마태복음 6장 17절, 예수님께서 금식할 때 하라고 하신 바로 그 행동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다윗은 응답을 못 받은 자리에서도 그렇게 했던 거에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금식하는 자에게 상이 있다고 읽으신 것, 맞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이 “이미 받았다”는 말은 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거리에서 받을 존중 다 받아서, 천국에 남은 게 없다는 뜻이고요. ‘아포디도미’ 뜻풀이도 정확하십니다.

    다만 그 단어가 못 박는 건 ‘갚으시는 분’과 ‘반드시 갚으신다는 사실’이지 ‘무엇을 갚으실지’는 아니에요. 본문이 목적어를 비워뒀거든요?

    그러니 구체적으로 행하실 바를 적시하셨다기보다는,

    갚으실 분과 갚으심의 확실성을 못 박으시고 그 내용은 아버지 손에 맡겨두셨다고 읽는 편이 본문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집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지렛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를 여는 자리에요.

    지렛대라면 힘이 모자랄까 늘 불안하겠지만, 여는 자리라면 열기만 하면 되잖아요?

     

    말 나온 김에, 금식이란 무엇인가

    이왕 말이 나왔으니 금식이라는 걸 성경 전체에서 한번 훑어보겠습니다.

    예전에 성경강좌에서 이사야 58장과 스가랴 7~8장을 다루면서 말씀드렸던 내용인데, 이 참에 정리해서 다시 붙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금식은 딱 하루뿐입니다

    이게 의외로 잘 모르시는 부분이에요. 율법 전체에서 하나님이 “금식하라” 하고 명하신 날이 며칠이나 되겠습니까? 딱 하루입니다. 대속죄일이에요.

    레 16:29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이 표현이 금식을 포함하는 말인데요, 일 년에 이 하루뿐이에요. 나머지는 다 사람이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럼 스가랴 7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네 번의 금식, 4월·5월·7월·10월 금식은 뭡니까? 이것도 다 사람이 만든 거에요. 그것도 아주 슬픈 사연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열왕기하 25장을 열어보면 날짜가 그대로 나와요.

    • 10월 —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한 달(왕하 25:1)

    • 4월 — 성벽이 뚫리고 성이 함락된 달(렘 39:2)

    • 5월 — 성전이 불탄 달(왕하 25:8~9)

    • 7월 — 남은 총독 그달리야가 살해당한 달(왕하 25:25)

    무너지고, 뚫리고, 타고, 죽고. 아픈 날마다 금식을 하나씩 붙여놓은 겁니다. 마음은 이해가 되죠? 그들은 70년을 그렇게 금식하면서 지켰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금식을 계산에 안 넣으셨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다음에 이 사람들이 예언자를 찾아옵니다. 물어보러 온 거에요.

    슥 7: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여태 해오던 대로 올해에도 금식할까요?’ 이런 질문이거든요? 얼마나 경건한 질문 같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대답이 이래요.

    슥 7: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슥 7: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야, 니들이 하는 그 금식이 나를 위해 한 거냐? 먹고 마실 때도 니들 위해 먹고 마셨고, 금식할 때도 니들 위해서 한 거 아니냐? 자기를 위해서 해놓고 그걸 왜 나한테 묻냐?’ 이런 말씀이에요.

    그러면서 정말 물어야 할 걸 알려주십니다.

    슥 7: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슥 7: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금식할까요 말까요, 그건 하나도 중요한 질문이 아니라는 거에요.

    재판 똑바로 하고, 서로 불쌍히 여겨주고, 힘없는 사람 짓밟지 말고, 남 해칠 궁리 하지 마라.

    쉽게 말하면, "이미 너희들에게 준 율례와 법도를 따르며 살아라. 나는 금식보다 그게 좋다." 이 말씀입니다.

    이사야 58장은 더 세게 나가요. 백성들이 항의를 하거든요?

    사 58: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금식하는데 왜 한 번 쳐다봐주지도 않으십니까? 이런 말이거든요?)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금식한다면서 즐길 것 다 즐기고, 종들 잡아다 일 시킬 것 다 시키면서 무슨 금식이냐는 거죠?) 사 58: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금식하면서 싸우고 있대요. 그게 무슨 금식입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말씀하시는데요.

    사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여기 “기뻐하는”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바하르(בָּחַר)’인데요, 원래 뜻은 ‘내가 고른다, 내가 택한다’에 가깝습니다. ‘기뻐하는’은 의역이에요. 그래서 메시지 성경은 ‘내가 찾는 금식’이라는 식으로 옮겨두었더라구요. 하나님이 골라내신 금식, 하나님이 찾으시는 금식이 뭐냐? 굶는 게 아니라 결박을 풀고 나눠주는 삶이라는 거죠.

     

    성경이 보여주는 금식의 자리들

    그럼 성경에 나오는 금식은 다 뭐냐? 이걸 한번 훑어보면 아주 재미있는 게 하나 보입니다. 같이 보시죠.

    • 슬픔을 못 이길 때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뒤에 야베스 사람들이 칠 일을 금식했어요(삼상 31:13). 다윗과 그 사람들도 저녁까지 금식하며 울었고요(삼하 1:12).

    • 죄를 깨닫고 돌이킬 때 합니다. 미스바에서 이스라엘이 물을 부으며 금식했잖아요?(삼상 7:6) 그 악한 아합도 하나님 말씀 듣고 굵은 베 두르고 금식했더니, 하나님이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하셨어요(왕상 21:27~29). 니느웨도 그랬고요.

    • 도무지 답이 안 나올 때,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합니다. 사사기 20장 보시면 열한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싸우다가 감정에 치우쳐서 한 지파가 통째로 없어지게 생겼거든요? 악을 응징하자니 지파가 사라지고, 놔두자니 악이 판치고. 그래서 벧엘에 올라가 울며 금식합니다(삿 20:26). 여호사밧도 대군이 쳐들어올 때 온 유다에 금식을 선포했고요(대하 20:3). 에스라도 아하와 강가에서 그랬어요(스 8:21).

    • 내가 아닌 남을 위해서 합니다. 에스더가 삼 일 금식을 청한 게 자기 살자고 한 게 아니잖아요?(에 4:16) 느헤미야도 성벽 무너진 소식 듣고 수일을 금식했습니다(느 1:4).

    • 마음을 한곳에 모으려고, 유혹을 이기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십 일 금식이 그거였죠. 그리고 그 금식 끝에 하신 일이 뭐였습니까?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요구를 물리치신 거였어요. 금식의 정점이 소원 성취가 아니라 아버지께 매인 삶이었던 겁니다.

    • 억눌린 사람 편에 서서 항의로 합니다. 이사야 58장 6절이 그 이야기죠. 우리 현대사에서도 정치 지도자들이 단식으로 항의한 일이 여러 번 있었잖아요? 그것도 이 계열입니다.

    • 굶는 사람 처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배부른 사람은 배고픈 사람 사정을 몰라요. 며칠만 굶어보면 알아지거든요? 이사야 58장 7절이 그리로 갑니다.

    자, 이렇게 쭉 늘어놓고 보니까 공통점이 하나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하나도 없어요. 전부 사람 쪽 사정입니다.

    슬퍼서, 미안해서, 답답해서, 무서워서, 남이 딱해서. 금식은 하나님이 필요해서 시키신 게 아니라 내가 필요해서 하는 거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가랴 백성들의 그 질문이 왜 틀렸는지가 이제 보이시죠?

    “금식할까요, 말까요?” 이건 하나님께 물을 질문이 아니었던 거에요.

    하고 싶으면 하고 말면 마는 거지, 그걸 왜 하나님께 묻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걸 물었어야죠.

     

    유대인들의 또 하나의 금식 — 아브월 아홉째 날

    여기 하나 더 붙일 게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금도 지키는 금식일 중에 ‘티샤 베아브’, 아브월 아홉째 날이 있어요.

    대개 우리 달력으로 7월 말에서 8월 사이에 듭니다. 이 날이 무슨 날이냐면, 첫 성전이 무너진 날이자 두 번째 성전이 불탄 날로 기억되는 날이에요. 로마군에 의해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무너졌잖아요?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그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백만 명이 넘고, 붙들려 간 사람이 구만 명이 넘는다고 나옵니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이 로마 콜로세움 짓는 데 동원됐다고 하죠.

    그때 성전에서 서쪽 벽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게 지금의 통곡의 벽이에요. 해외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죽기 전에 예루살렘 한번 가봤으면 하다가, 막상 그 벽 앞에 서면 누구랄 것 없이 이마를 대고 통곡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날이 되면 금식하며 애곡을 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사에도 금식하며 애통할 만한 날이 없지 않아요. 1895년 을미사변, 우리 나라 왕비를 일본 사무라이들이 들어와 시해한 일이죠. 1910년 경술국치도 있고요. 그런데 우리는 금식은커녕 기억도 잘 안 합니다. 8월 29일에 뭘 슬퍼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이스라엘 역사만 공부하고 우리 역사는 안 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 어쩌면 성경이 우리한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그럼 우리는 금식하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도 “금식할 때에”라고 하셨지 “금식하지 말라” 하지 않으셨어요. 전제하고 말씀하신 겁니다. 다만 머리에 기름 바르고 얼굴 씻으라고 하셨죠. 티내지 말라는 거에요.

    버려야 할 건 금식 자체가 아니라 두 가지 착각입니다. 하나는 금식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지렛대라는 착각이고요, 또 하나는 금식이 하나님께 드리는 공로라는 착각이에요. 이 둘만 빼면 금식은 좋은 겁니다. 금식할 일이 생기면 하는 거죠. 밤새워 기도할 일이 생기면 밤새우는 거고요.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녀가 뭐 맘에 안 든다고 밥상 앞에서 안 먹고 버티고 있으면 부모 마음이 기쁩니까? 그 모습이 기특해 보이세요? 부모는 자녀가 밥 잘 챙겨 먹고 말 잘 듣는 걸 원하지, 굶는 걸 원하지 않잖아요? 하나님도 똑같으신 겁니다.

    스가랴 8장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끝내는지 보세요.

    슥 8:16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금식이 아니라, 이런걸 하라는 겁니다)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슥 8:19 …4월의 금식과 5월의 금식과 7월의 금식과 10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그렇게 살면, 금식해야 하던 날이 잔칫날로 바뀐다는 겁니다. 굶던 자리가 먹는 자리가 된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말은 이런겁니다. 참 인격적이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울고 굶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서 자녀 된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걸 원하시는 분이에요.

     

    정리한다면,

    결국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건 굶는 사람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금식하면 상이 있느냐, 있습니다.

    갚으시느냐, 갚으십니다. 그

    런데 그 상은 내가 며칠을 굶었느냐로 매겨지는 값이 아니에요. 아무도 안 보는 자리에서 아버지 한 분만 바라봤던 그 마음을, 아버지께서 잊지 않고 정산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금식하는 날에만 유효한 게 아니라,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며 사는 모든 날에 유효한 거고요.

    “하나님은 굶는 것보다 바르게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금식할 일이 생기면 하십시오. 그러나 금식할 일 없이 사는 게 더 좋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 그것 하나로 이미 상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저와 집사님에게 힘과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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