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의 제목은 '전시의 학문'이다.
이 책은 짧은 글로서 저자가 기록한 책, '영광의 무게' 에 있는 한 '챕터'이며 한참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을 당시에 "학문의 필요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답변하고자 기록한 내용이다.
저자가 당면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매순간 천국이나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피조물이다. 이런 우리가 세상에서 허락된 짧은 시간의 한 조각이라도 문학이나 예술, 수학이나 생물학같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일들에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아니, 그런 일이 심리적으로 어떻게 가능할까?"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또한 같은 상황속에 있는 사람으로서 진지하게 사색하고 본서를 통해 답변한다.
한번 되물어보자.
우리의 삶이 정상적이었던 때가 있었던가?
가장 평화롭다고 말하던 19세기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위기, 불안, 어려움, 긴금 상황들로 가득했다. 임박한 위험을 면한 뒤나 심각한 불의를 바로잡은 뒤에아만 문화적인 활동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제껏 럴만한 시기는 단언컨대 한번도 없었다.
동물들은 물질적 부와 안전한 보금자리를 먼저 추구했지만 인간은 다르다.
포위된 도시에서도 수학 공리를 내놓고, 사형수 감방에서 형이상학적 논증을 펴고, 교수대를 두고 농담하고, 퀘벡 성채로 진군하면서 새로 지은 시를 토론하고, 테르모필레에서도 머리를 빗을수 있는 존재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다.
저자는 자신이 겪고 있는 전시의 상황을 하나님을 영접하는 상황과 연계하여 설명한다.
"회심한 사람이 이전에 행하던 모든 일을 회심하기 전과 똑같이 행한다. 단지 새로운 정신으로 행하는 것이다."
회심도 군복무도 인간적 생활을 말살해 버리지는 않는다는 저자의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종교와 전쟁이 주장하는 권리의 비슷한 점이라면, 회심을 하건 참전을 하건 그 이전까지 살아왔던 생활이 중단되거나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우리의 자연적인 활동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활동들로 대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우리의 자연적 활동들을 초자연적 목적들에 사용하는 새로운 조직이며, 베토벤의 작곡과 파출부의 청소는 정확히 똑같은 조건으로, 즉 하나님께 바쳐지고, "주께 하듯" 겸손하게 할 때에만 영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기 소명에 맞게 선택하면 될 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두더지는 땅을 파야 하고 수탉은 울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지만, 각자 다른 소명을 받은 구별된 지체들이니 말이다.
만약, 우리가 지식의 대상보다 지식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면, 재능을 활용하는데서 기쁨을 얻지 않고, 그 재능이 우리 것이라는 사실, 더 나아가 그것이 가져다주는 명성을 기뻐하게 된다면 오른쪽 눈을 빼야할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전시라고 해도 학문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나쁜 철학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철학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상의 주장을 통하여 학문(또는 삶의 모든 활동)이 상황과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소명의 문제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전쟁의 상황속에서 흥분하고 감정적으로 동요된다면, 그래서 다른 관심사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느라 연구활동에 착수할 수도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연구에 적합한 상황이란 결코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평시든, 전시든, 미덕을 실천하고 행복을 누릴 시간을 미래로 미루지 말아야 한다. '지금이 바로 공부해야 할 때'이며, 지금이 바로 헌신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께 겸손하게 드려진 학문생활이 우리가 내세에서 온전하게 누릴 신적 실재와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방법이며, 결국 그것은 소명의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저자의 간곡한 조언이 깊이있게 와닿는다.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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