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지난번에 서평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을 쓴 유기성 목사님의 두번째 책이다.
총 3개의 파트,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징은 이재철 목사님의 "비전의 사람"과 동일하다.
장신대 부흥사경회에서 전한 말씀을 엮어서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유목사님의 첫번째 책과도 내용이 다소 중복된다.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1.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셨습니까?
저자는 계 3:20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루 밥 세끼 늘 같이 먹는 것처럼 친근하게 함께하자는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곧 예수님과의 동행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다고 말하고, 또 그러기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진심으로는 원하지 않고 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면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집에 손님이 와있어도 하지 않을 행동들을, 예수님이 정말 보고 계신다고 믿는다면 할 수 있겠는가?
정말로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동행하고 있다면 아래의 현상들이 있는가? 그 유무를 통해 점검해보자.
예수님을 진짜로 영접했다면, 참을수 없는 기쁨이 실제적으로 임하고, 예수님을 얻은 것이 너무 귀하게 여겨져 그 외에는 배설물처럼 아깝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가?
어떤 고난이 있어도 예수님때문에 '지금' 행복을 누리고 있는가?
정말 영접했다면, 예수님 한분이면 되는 것이라는 저자의 설명이 마음 깊이 와닿는다.
2.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한 선교사님이 무엇이 가장 두렵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을때 가장 두렵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만이 그 임재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법이다. 주님의 임재를 아는 사람은 은밀한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예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치 이 자리에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때가 있다. 주님의 임재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지식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의 실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해도 넘어야 할 단계는 여전히 있다.
그 주님이 나에게 손님이신가? 주인이신가?
손님이시라면 여전히 내가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시라면 나의 자아는 죽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주님을 '주인님'으로 모셨다. 그의 삶에 나타난 모든 일들은 주인님이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다. 그의 자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처리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자아가 처리되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존재일수밖에 없다. 자아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모든 일과 사역은 자기만족일 뿐이다. 훗날 주님앞에 섰을때 주님께서 "너는 나름 열심히 한 것 같은데, 나는 한번도 너를 써본적이 없다"고 하신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하는 세례예식은 바로 이 자아에 대한 장례식이다. 그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선포다. 그래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나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었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죽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예수님이 하신 것이다. 결국 나의 자아의 죽음은 받아들이는데서 오는 것이다.
3. 예수님만 구하십니까?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려면 성령충만함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구해야"합니다.
저자는 구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다른 것은 뇌리에 떠오르지도 않고,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고 몰두하며 구하는 것"
밥을 먹어도, 잠을 잘때도, 새벽에 잠에서 깨어서도, 길을 걸을 때도,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눌때도, 나는 물론이고 모든 이가 느낄 정도로 예수님만 구하는 것.
내가 이해하기로 이 설명은 '갈망'을 말하는 것이다.
목마른 사슴이 목이 너무 말라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물만을 애타게 찾는 심정
물 깊은 곳에 빠져서 너무나 숨이 차서 숨을 쉴 수 있는 공기를 애타게 찾는 심정...
저자는 예수님을 구할때 '이런 심정'으로 구하라고 말하고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조건도 붙이지 말고, 완전히 백지위임하며 주님만을 구하는 것. 그것이 주님을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4.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까?
본장의 질문은 참 고전적인 질문이다. 왜 고전적인가? 그만큼 답하기 어려워서이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답이 삶에 나타나기가 쉽지 않아서이다.
예수님 한분으로 충분해지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최소한 예수님 이외의 것들이 배설물로 여겨질만한 '사고의 획기적 전환'이 필요하다.
바울은 삼층천에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다.
우리 주님이 어떻게 오시며, 언제 오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알았다. 그때 사도바울은 더이상 세상에 '미련'이 없어졌다. 아무리 화려해도 그저 배설물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실하게' 믿으면 사실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어설프게' 믿거나, 믿는 줄 알았는데 안믿고 있다면 세상의 것에 욕심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사람들은 그 욕심을 죽이려고, 나의 자아를 죽이려고 그렇게 애를 쓴다. 그런데 방법은 '죽기 위해 노력'하는데 있지 않다.
"이미 내가 죽었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의 죽음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그게 '영접'의 진짜 의미다.
물론 우리안에 여전히 혈기와 성질, 음란한 마음과 욕심이 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우리 안에서 변한 것은 '죄의 존재'가 아니라 '죄의 지위'다. 아직 내 삶에 죄가 있을 지언정, 그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는 못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죄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죄와 '싸울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 싸움은 '완전한 순종'에서 드러난다. 들어보고, 계산해보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순종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니!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우리 삶의 재물이나 기회등이 상실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할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지도 아니며, 우리의 코묻은 돈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기회? 기회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그저 우리의 마음을 원하셨던 것이다. 우리 마음이 재물이나 기회에 있기 때문에 시험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예수님 한분만으로 충분하게 여긴다면, 사실 나머지는 우리에게 시험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순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주님의 뜻이 확실하면 쿨하게 순종할 뿐이다.
5. 예수님을 24시간 바라보십니까?
우리 성결교단의 선배님 중에는 이성봉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시다. 항상 오른손을 주먹쥐고 사시던 분이었다. 하루는 누가 물었다.
"목사님 손에 장애가 있어보이지는 않는데 왜 그렇게 주먹을 쥐고 사십니까?"
"나는 지금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있는 걸세"
이성봉 목사님은 정말로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신 것을 실제로 믿고 사신 분이다. 24시간이나 말이다.
비슷한 외국의 인물로 '프랭크 루박'이라는 선교사님이 계시다. 이 선교사님이 어느날 결심을 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나를 보고 계신다면 나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겠다!"
그래서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주님을 바라본 것, 밥먹을때 주님을 바라본 것, 하루에 몇번이나 주님을 바라보았는지 그 삶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 일기가 "프랭크 루박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시중에 출판되어 있다.
그 일기를 읽어보면 3월의 삶이 다르고, 4월, 5월, 6월의 삶이 다르다. 이 '영성일기'를 쓰기 시작한지 6개월이 되었을때 주님의 임재가 놀랍게 경험되어졌다고 한다. 주님이 정말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믿어진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도 내 삶을 되돌아보았다. 나도 예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가? 인식하는가? 정말 믿는가?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던 순간이 대부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과 '망각'하는 것의 차이는 삶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성령체험이 있냐 없냐와 전혀 별개의 이야기다. 강력하게 성령님을 체험하고도 주님과 동행하지 않은 사람들이 '천지빼까리'다.
저자가 담임하는 선한목자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을 비롯하여 모든 부교역자, 남자성도들이 이 '영성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주님을 생각만 하고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6개월이 고비다. 꾸준함이 필요하다. 한번 도전해보자.
6. 예수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이 질문에 "네 주님, 언제나 주님은 제가 제일 사랑하는 분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주님이 기뻐하실까?
놀랍게도 대답은 '아니오'다.
주님은 우리에게 첫번째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난 당신이 항상 첫째에요. 미스터 김은 두번째고, 부장님은 세번째에요"라고 한다면, 정말 기쁠까?
적어도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모든 것이기를 바란다. 그저 타인에 비해 우선적인 순위를 점했다는 것은 하나도 기쁘지 않다. 적어도 배우자로서 오직 나만을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마찬가지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자 '유일한 분'으로 여겨지시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정말 주님만 믿고, 주님만 의지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방해하는 사람이 될수도 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지체들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하듯이 말이다.
교회에서 봉사도 마찬가지. 책임감 때문에 관계때문에 하는 것은 예수님과 무관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 그게 헌신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면 자꾸 생각나기 마련이다. 그 마음에 가득 채워지기 마련이다. 돌아보라. 지금 그 마음에 무엇이 가득채워져 있는지...
로렌스형제는 하나님의 임재연습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사람과 친해진 뒤에야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친해지려면 그 사람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려면 예수님을 자주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더 자주 생각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귀히 여기는 것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법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사랑하라"
7.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니까?
믿음은 행위를 동반하게 되어있다. 행위가 없다면 죽은 믿음이다. 그러면 어떤 행위를 동반할까?
답은 간단하다. 사랑이다.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지 분별할 수 있는 방법?
그 사람이 '사랑'을 흘려보내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다면 그건 매우 심각한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1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돌아오는 길에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다면 용서하는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마음에 탕감받은 기쁨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만달란트를 탕감받은지 10년만에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다면? 30년이 지나서 만났다면?
자신이 탕감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지 못하고 잊어버린 상태에서 만났다면 용서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나고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가 넘쳐서 엉엉 운 기억은 흔하게 있다. 그러나 그때 그 감정을 몇십년동안 간직하면서 여전히 그 감격으로 사는 사람은 거의 만나보기 어렵다. 시간이 지나면 '당연시'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 기쁨과 감사의 감정을 간직하며 살 수 있을까?
지금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의 눈이 열리면 가능하다. 그러면 그것이 날마다 내게 주시는 은혜로 여겨진다.
예수님이 정말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주님이 되시고 내 생명이 되시면 비로소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통해 흘러가는 것이다.
이것이 내 힘으로 사랑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십자가의 복음이 분명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다. 그런데 독생자 예수님까지 희생시키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의 주인께서는 단 한가지만 부탁하셨다.
"사랑만 하며 살면 된다"
우리가 사랑만 하면 다른 것은 주님이 다 하신다.
우리는 그저 사랑만 하자.
본서는 참 읽기 편한 책이다. 내용자체가 설교집이기 때문이다. 설교집의 특징중 하나는 동기부여다. 미약하지만 나도 영성일기를 쓰며, 예수님을 의식하며 살려는 노력을 해보려 한다. 신앙생활의 침체기 또는 매너리즘에 빠진 분이라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일독을 권한다.
PART 1. 예수님과 하나됨
1.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셨습니까?
2.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까?
PART 2. 예수님과 동행
3. 예수님만 구하십니까?
4. 예수님 한분이면 충분합니까?
5. 예수님을 24시간 바라보십니까?
PART 3. 예수님과 사랑
6. 예수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7.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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